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계 정책 (문단 편집) == 결과 == '''외교의 천재 비스마르크의 정책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빌헬름 2세의 야심찬 계획은 [[유럽]] 전역에 거센 반발과 함께 외교적 고립을 유발하면서 실패하였다. 더 나아가 빌헬름 2세의 오판에 따라 독일은 '''공격적 대외 정책 → 다른 열강들의 반발로 실패 → 체면을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외교적 무리수 → 실패'''라는 악순환을 반복했고 독일의 입지는 시간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비스마르크가 통치할 시기 독일은 결코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같은 배를 탄 동맹의 일원이었으며, [[러시아 제국|러시아]]와는 상호 안보 조약을 맺었고, 영국-[[스페인 왕정 복고|스페인]]-[[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과도 [[대서양]]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를 완벽히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등 오히려 고립을 시키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세계 정책으로 인하여 국제 정세는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독일의 팽창에 두려움을 품은 러시아는 프랑스와 [[러불동맹]]을 맺으면서 독일은 동서 양면에 적을 두게 되었고, 급기야 오랜 세월 [[고립주의]]를 견지해온 영국 역시 독일의 팽창에 위기감을 느끼고 수백년간의 경쟁자였던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삼국 협상]]을 성사시키면서 독일은 외교적으로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삼국 동맹]]이 있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나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에 비해서는 국력의 차이가 명확했다.[* 이탈리아는 열강 최약체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GDP 규모 자체는 프랑스와 비슷하여 잠재적 국력은 괜찮았지만, 실상은 헝가리와의 불화와 제국내 크로아티아인,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루마니아인, 폴란드인등의 반발로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이때 국방비도 극도로 감축되어, 과장 조금 보태면 반세기 전 헝가리 혁명때와 비교해도 낫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앙숙지간[* 오스트리아 제국 내부에 소위 미수복 지구라 불리는 트렌토 및 쥐트티롤,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일대 이탈리아인 거주지역이 남아 있었고, 이탈리아 내에서는 오스트리아를 무찌르고 [[리소르지멘토]]를 완전히 끝마쳐야 한다는 담론이 계속 나왔다. 군사적으로도 두 국가는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건함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인 상황에서 동맹으로 묶어둔 만큼 삼국 동맹 자체도 결함이 심각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경우 프랑스가 가상적국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삼국 동맹의 군사적 기능에 의존하기보다는 방관에 가까운 자세를 취했다. 이렇듯 삼국 동맹은 자체적인 국력의 한계가 있었고, 제대로 된 군사동맹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요소도 컸다. 더 나아가 빌헬름 2세의 이 현실성 없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큰 원인'''이 되어 필연적으로 독일 제국을 [[양면전쟁]]의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